본문 바로가기

mobile/canada

주문

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  -  최돈선

 

지금은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 얼굴이
비 오는 날 파밭을 지나다 보면 생각난다
무언가 두고 온 그리움이 있다는 것일까


그대는 하이얀 파꽃으로 흔들리다가 떠나는 건
모두 다 비가 되는 것이라고 조용히 조용히
내 안에 와 불러 보지만 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

망설이며 뒤를 돌아보면서도
나는 입밖에 그 말 한마디 하지를 못했다


가야할 길은 먼데
또 다시 돌아올 길은 기약 없으므로

저토록 자욱이 비안개 피어오르는 들판 끝에서
이제야 내가 왜 젖어서 날지 못하는가를 알게 되었다
어디선가 낮닭이 울더라도 새벽이 오기에는
내가 가야 할 길이 너무 멀므로


네가 부르는 메아리 소리에도
나는 사랑이란 말을 가슴속으로만 간직해야 했다



--------------------

난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. 그런데 가끔 멍하니 있을때 떠오르는 싯구들이 있다.
다 사춘기때 읽은 것들이다.
지금와서 자주 떠오르는 싯구들을 찾아 어린 시절에 읽었던 그 시들을 읽어보면 '내가 그때 이 시를 무슨 생각으로 읽었을까' 싶다.
아마 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역사도 모르는 도시를 헤매듯이 겉만 읽었겠지...

사춘기때 최돈선씨 책 두 권을 읽고 읽고 또 읽었었다.
어릴때는 아빠의 세계를 동경했었고 춘천의 시인인 최돈선씨를 동경했었고 팬레터까지 썼었다. ㅎㅎ 보내진 않았지만...

비 올때나, 정말로 파꽃 옆을 지날때 이 시가 생각난다.
서른 이후에 읽었다면 한 번 읽고 잊어버렸을 것 같은데... 그땐 왜 그렇게 좋았을까.


가끔 악몽을 꾼 새벽에 침대에 누워 어린 시절에 할머니 옆에서 외웠던 주 기도문을 중얼중얼 하듯이
이런저런 '추억'이 된 싯구들을 중얼거린다.
시가 좋아서가 아니라...
어린 시절의 내가 그리워서.


내가,
무언가를
다시 그렇게

좋아할 수 있을까?




사실 오늘 정작 떠올랐던 싯구는 최돈선님의 '엽서' 마지막 구절
'바람과 함께 흐린 날이 왔다'